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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영 파워 >> 청년 3인의 해외 취업 성공기
조엘글로벌컨설팅 조회수:1109
2016-10-18 14:56:29

취업난이 심각해지자 해외취업에 눈을 돌린 청년들이 있었다. 그들은 더 넓은 공간에서 꿈을 펼치길 원했다. 웨타 디지털의 노응호 디지털 모델러(컴퓨터그래픽 영상 제작자), OECD의 정기욱 컨설턴트, 르네상스 베이징 차오양 호텔의 심두현 영업·마케팅 이사가 주인공이다. 이들의 해외취업 성공비결과 현지 생활을 소개한다. 인터뷰는 4~5월 사이에 여러 차례 이메일과 전화로 진행했다. 

 

 

노응호 웨타 디지털 디지털 모델러
뉴질랜드에서 꿈 찾은 토종 젊은이
미국 영화제작사 방문 후 해외 취업 결심… <아바타> 3D 제작 참여


2009년 개봉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3D 영화 <아바타>의 배경은 행성 판도라다. 컴퓨터 그래픽(CG)으로 키가 큰 나무와 가파른 절벽의 원시림을 만들었다. 이 작업에 3D 제작기업인 웨타 디지털(Weta Digital)의 노응호(35) 디지털 모델러가 참여했다. 디지털 모델러는 CG 상의 여러 영상을 만든다. 노씨는 영화의 주된 전투배경인 판도라 행성을 제작했다. 팀원과 수작업으로 나무를 한 그루씩 심고 돌을 쌓았다.

웨타 디지털은 영화 <반지의 제왕> <킹콩> <아바타>로 알려진 세계적인 컴퓨터그래픽 특수효과 전문회사다. 영화 <반지의 제왕>의 피터 잭슨 감독이 설립한 웨타 스튜디오(WETA Studio)에서 시각효과를 담당하는 부서다. 뉴질랜드의 수도 웰링턴에 본사가 있다. 영화 <아바타>의 CG작업 중 3분의 2가량을 웨타 디지털에서 수주했다. 이 회사에서 한국인 아티스트 9명이 <아바타>의 캐릭터 창작과 표정 살리기를 맡았다.

노씨는 2009년 3월 웨타 디지털에 취업했다. 처음 맡은 일은 판도라 행성 3D 작업이었다. 2년 전부터 진행된 ‘아바타’ 관련 작업에서 가장 어려운 이 부분이 남아 있었다. 그는 주당 90시간가량 일하며 열정을 쏟았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어요. 어떤 일을 지시해도 잘한다는 인상을 주려고요. 감독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하면 처음부터 다시 만들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대학교육까지 받았다. 영어 한마디 편하게 못했던 그가 어떻게 해외의 세계적인 3D 제작기업에 취업했을까? 강원대 디자인학과 4학년 때 지도교수를 따라 미국 캘리포니아의 소니 스튜디오를 비롯한 세계적인 영화제작사를 방문했던 일이 계기가 됐다. “가서 보고 그런 기업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같은 학과 졸업생 상당수가 국내에서 취업해 제품 디자인을 하던 때였다.
 


노응호 디지털 모델러는 2009년 개봉한 3D 영화 <아바타>의 주된 전투배경인 판도라 행성을 제작했다.

그는 제품 디자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상상한 것을 만들어내는 데 흥미가 있었다. 그는 친구를 따라 대학 2학년 때부터 CG 동아리 활동을 했다. “사람이나 외계인을 만들었어요.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다른 학생이 한 달 걸려서 할 일을 전 며칠 만에 해냈어요. 이쪽에 재능이 있다고 느꼈죠.” 노씨는 미국의 디자인 전문대학으로 유학을 결심했다.

대학 졸업 후 2년 동안 유학준비를 했다. 유학자금은 2000만원으로 잡았다. 최대한 절약하면 그 돈으로 1년은 버티리라 예상했다. 그 후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 한 컴퓨터그래픽 업체에 취업했다. 그런데 6개월 동안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처음에는 해외사업이 잘되면 약속한 임금을 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나중에 항의했더니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았느냐’는 답을 받았어요. 그 후로는 서명하기 전에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봅니다.” 그는 이후 지인 소개로 방송 프로그램 CG 일을 맡았다.

유학자금 마련하려다 사기당해
틈틈이 어학원에서 영어를 익혔다. 그동안 영어와 담을 쌓고 지내 처음에는 고생했다. 영어회화를 중심으로 시작해 차근차근 영어실력을 쌓았다. “말을 하다가 다양한 표현을 쓰고 싶어졌어요. 필요한 단어와 문법을 공부했습니다. 어학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려 하기보다는 활용이 가능하게 연습했습니다.”

2005년 9월에 노씨는 샌프란시스코 소재 디자인 전문대학인 ‘아카데미 오브 아트 유니버시티’에 입학했다. 여자친구와 결혼해 신혼여행 비용까지 들고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아카데미 오브 아트 유니버시티’는 강원대 지도교수가 졸업한 학교였다. 대학 주변에 시각특수효과로 유명한 ILM(Industrial Light & Magic), 티펫 스튜디오,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드림웍스와 픽사가 있다. 강의를 주변 기업 임직원이 하는 경우가 많아 졸업생이 취업에 유리했다.

하지만 3년 석사과정을 마치기가 쉽지 않았다. 준비한 비용은 한 학기 만에 바닥이 났다. 물가가 예상보다 비쌌다. 노씨는 졸업 전까지 게임 개발업체와 컴퓨터그래픽 3D 영상 스튜디오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함께 유학을 시작한 부인은 학업을 중단하고 생활비와 남편 학비를 벌었다. 식사는 교회의 도움을 받았다. 교회에서 주는 밥을 먹고, 그곳에서 만든 반찬을 집에 싸왔다.

2008년 12월에 어렵게 졸업했다. 하지만 체류 문제가 있었다. 기업체 등에 취업한 뒤 다음해 4월까지 취업비자 신청을 해야 미국에 머물 수 있었다. 노씨는 여러 업체에 그동안의 작품을 모은 포트폴리오를 냈다.
당초 미국 회사를 희망했지만 뉴질랜드 회사인 웨타 디지털에서 연락을 받고 면접을 봤다. 2009년 2월에 웨타 디지털에 취업해 뉴질랜드로 갔다.

해외 기업에 취업하려면 뛰어난 실력은 기본이다. “포트폴리오가 눈에 확 들어와야 해요. 해외기업이 외국인에게 높은 임금을 주고 채용할 때는 더 신중을 기하거든요. 작품수준이 인터넷 검색으로 찾은 최고의 작품만큼 뛰어나거나 그보다 더 낫도록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초기에는 뉴질랜드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 발음·억양에 차이가 있어 어려움을 겪었다. 예컨대 미국식 발음의 ‘에’를 뉴질랜드식으로는 ‘이’로 발음한다. 발음이 다른 단어가 여러 개 쓰인 문장을 듣고 이해하지 못해 다시 말해달라고 한 경우가 많다.
 


노응호 씨가 근무하는 3D 제작기업 웨타 디지털에서 영화 <아바타>의 CG작업 중 3분의 2가량을 수주했다.

부인 이영경(31) 씨는 처음에는 뉴질랜드 생활에 적응을 못 했다. 이씨는 미국에서 아들을 낳고 날씨가 가장 추울 때 뉴질랜드에 왔다. 아는 사람이 없어 집 안에 있을 때가 많았던 그는 우울증과 비슷한 증세를 앓았다. 부인이 힘들어하자 노씨는 거주지를 바꾸려고 다른 회사에 지원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부인의 상태가 나아졌다. 아이를 키우며 현지에서 친구를 사귀었다. 지금은 둘째 아이를 임신했다. “그동안 아내가 많이 고생했어요. 아이들이 자라면 아내가 다시 공부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공상 즐기는 ‘4차원’ 디지털 모델러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일하는 웨타 디지털에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한다. 임직원 사이에 문화 차이가 커서 회사는 특히 그 부분에 신경을 쓴다. 한국인 직원은 10명 정도 있다. 그는 한국인 직원 사이에서 ‘독특한(unique)’ 캐릭터로 통한다. “남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반응을 보여 ‘4차원’으로 불릴 때가 있어요.”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초등학교 때는 수업시간에 멍하니 앉아 있어 혼이 난 적이 많다. “자주 어떤 상황을 떠올리며 그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어요.” 가끔은 엉뚱한 물건을 만들었다. 미술과 체육시간을 좋아했는데 다른 과목 성적은 좋지 않았다. “고3 때 뭘 잘하는지 생각했어요. 그림 그리기, 상상하기, 컴퓨터 다루기였죠.” 그는 적성을 살려 대학 디자인학과에 진학했다.

웨타 디지털에서의 생활은 기대 이상이었다. 연봉이 높고, 초과근무수당이 꼬박꼬박 나온다. 복지 혜택도 많다. 예컨대 영화를 보거나 물건을 살 때 사원증을 보여주면 할인을 받는다. “웨타 디지털은 현지인도 무척 선호하는 직장이에요. 웨타 디지털에 다닌다고 하면 사람들이 친근하게 말을 겁니다.” 그는 물가가 비싼 편이지만 지금은 생활에 어려움이 없다고 했다.

웨타 디지털에는 계약직 직원 비율이 높다. 1000명이 넘는 직원 중 정년을 보장받는 직원은 5명 정도다. 나머지는 6개월이나 1년에 한 번씩 계약을 갱신한다. 계약직이라 불안하지는 않을까? 노씨는 해외 CG업계에서는 계약직이어서 좋은 점이 더 많다고 했다. “프로젝트에 따라 여러 회사로 옮겨 다니는 게 가능합니다. 또 일단 회사에서 꼭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받으면 자발적으로 나가기 전까지는 거의 안전합니다.”

근무시간은 유동적이다. 일하다 윈드서핑을 하고 오는 직원도 있다. 몸 상태가 안 좋거나 다른 일이 있으면 조기 퇴근도 가능하다. 정해진 스케줄에 맞춰 일은 끝내야 한다. “회사가 임직원을 믿고 자유를 많이 줍니다.” 노씨는 보통 오전 8시쯤 출근해 오후 7시쯤 퇴근한다. 일이 많을 때는 저녁에 다시 회사에 가거나 토요일에 근무한다. 주말에 날씨가 좋으면 가족과 함께 차를 타고 밖으로 나가 자연을 즐긴다.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을까? 노씨는 장남으로서 부모님을 자주 뵙지 못해 마음이 편치는 않다고 했다. 한국으로 돌아갈까 고민도 했다. “하지만 한국의 CG업계 상황이 어떤지 아니까 선뜻 갈 마음이 생기지 않네요. 해외에서 더 많은 경험을 쌓고 싶습니다.”

요즘 그는 원숭이 털 만들기에 집중한다. 8월에 개봉할 영화 <혹성탈출:반란의 시작(Rise of the Apes)>에 등장하는 원숭이의 털을 디자인한다. <혹성탈출:반란의 시작>은 SF영화의 고전 <혹성탈출(Planet of the Apes)>의 프리퀄(prequel·전편보다 시간상 앞선 이야기)이다. 원숭이 수백 마리가 나오는데 각각 털 모양이 다르다. 일일이 수작업으로 털을 만든다. “점점 일이 많아져요. 바쁘지만 재미있습니다.”
 


 

정기욱 OECD 컨설턴트
OECD 협력 효율 높이는 한국 청년
유비쿼터스 분야 서적 5권 집필… 목표는 개발도상국 과학기술 정책 세우기


28세의 어린 나이에 국제기구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컨설턴트로 일을 시작했다.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OECD 행정부서(Executive Directorate) 내 정보화기획실의 정기욱(30) 컨설턴트는 젊은 IT전문가다. 2009년 8월 인턴직원으로 OECD에 합류해 4개월 후 정직원이 됐다. 그는 OECD 회원국의 각료와 부처 간 협업에 이용할 ‘U-OECD’ 프로젝트와 내부 정보인프라 개발업무를 맡았다. 초급 관리자인 A1 직급으로 한국 정부부처의 사무관급이다. OECD 정규직원에게는 면세 혜택이 주어지고 외교관 신분으로 체류증을 받는다.

그는 대학 재학 중 유비쿼터스와 같은 IT 트렌드에 관심이 많아 개인적으로 연구를 많이 했다. 포항에 있는 한동대에서 경영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대학 1학년 때 지도교수를 통해 유비쿼터스 관련 분야 정보를 처음 접했다. 2학년 때 처음으로 연구 논문을 썼다. 경영정보시스템 관련 해외저널과 경영전략 원서를 읽었다. 지도교수와 함께 교육과학기술부의 21세기 유비쿼터스 프론티어 사업단 연구 프로젝트에 연구원으로 참여했다.

2004년부터는 지인들과 유비쿼터스 관련 포럼을 운영하고 있다. 유노베이션(UNNOVATION)이라는 전문학술 민간연구단체의 대표로 각종 정부-민간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해 두각을 나타냈다. 관련 서적도 5권가량 집필했다.

첫 책은 지도교수와 함께 썼다. 유비쿼터스의 개념을 고민한 내용을 담았다. 국내에 유비쿼터스 분야의 명확한 기술 개론서가 없던 때였다. 그는 민간기업과 연구소의 무선인식(RFID) 시스템 관련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한창 바쁠 때는 잠을 2~3시간씩만 잤다. 새벽에는 늘 달리기나 수영 같은 운동을 했다. “제 연구 분야를 무척 좋아했어요. 밤새도록 해도 지겹지 않았죠. 저만의 분야를 만들어서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2008년 8월부터는 국토해양부의 U시티 관련 전문위원을 맡았다.

선교사 부모님을 따라 인도네시아에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다녀 언어능력도 있었다. 영어는 익숙하게 구사하고 인도네시아어·베트남어도 한다. 인도네시아에서 현지인 학교를 다니다가 장학금을 받고 국제학교에 갔다. 고2 때 카이스트 수시 전형에 지원했지만 낙방했다.

 


프랑스 파리 OECD 본부 건물 1층에 선 정기욱 컨설턴트.

부모의 권유로 한동대 특별전형 입학을 준비하면서 영어실력이 크게 늘었다. 영어 입학시험이 미국 대학원 입학능력시험인 GRE 수준으로 나와 그에 맞게 공부했다. 대학 때 6개월 정도 한 외국계 컨설팅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비즈니스 영어를 익혔다. 특정 기술 산업시장을 조사하고 비즈니스 모델을 연구해 영어로 보고서를 썼다.

하지만 OECD 입사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비슷하게 어렵다. OECD는 통상 공석이 생길 경우에만 채용하는데 경쟁률이 수천 대 1에 달한다. 그는 어떻게 기회를 잡았을까?

처음에 그는 국제기구에 취업할 생각이 없었다. 2009년 대학 졸업 후 보수 없이 국토해양부에서 전문위원으로 일하다 정책 전공으로 미국에 유학할 생각이었다. “유비쿼터스 분야 연구를 그만둘까도 했어요. 국토해양부에서 고시 출신 사무관이 깊은 전문지식 없이 유비쿼터스 관련 사업을 진행하는 모습을 보고 실망했거든요. 신분이 다른 제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한동대 총장의 전화 한 통에 그의 계획이 바뀌었다. “한동대가 OECD와 업무협약을 맺어 한동대 졸업생이 OECD에서 인턴으로 일할 기회가 생겼다며 저보고 OECD에 지원하라고 했습니다.” 김씨는 이력서를 OECD 담당자에게 보냈고, 영상통화를 이용해 면접을 봤다. 6개월쯤 후 합격통보를 받았다. 보통 OECD에 취업하는 데에는 짧게는 4개월, 길게는 1년 정도 걸린다.

김씨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 해외봉사단의 국제협력요원으로 베트남에서 봉사한 경력이 있어 OECD 면접 때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전문 분야 지식과 경력, 영어실력 또한 그의 강점이었다. 김씨는 군 복무 대신 베트남의 한 대학에서 2006년부터 2년 동안 기술교육을 했다. 무선인식 기술인 ‘RFID’와 무선제어장치를 컴퓨터로 프로그래밍하는 기술을 전했다.

2009년 초 김씨는 OECD 본부가 있는 프랑스 파리로 갔다. OECD 인턴 역시 보수가 없었다. 파리의 물가는 비쌌다. 그는 생활비를 아끼려고 한 달 동안 감자만 먹고 지내기도 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그는 ‘U-OECD’ 프로젝트를 비롯해 몇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면접 볼 때 면접관이 추진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던 일이었다. 김씨는 할 일을 마쳐야 한다는 생각에 퇴근시간인 오후 6시가 지나도 사무실에 남아 일을 했다.

4개월 후 그는 A1 직급으로 승진했다. “실력 있는 사람이 무급으로 고생한다고 여긴 부서장들이 국장을 설득해 얻은 결과예요.” 국제기구에서 인턴으로 일하다 정직원이 되기는 쉽지 않다. 보통 실력은 있어도 공석이 없으면 채용이 안 된다. 공석이 생겨도 인턴보다는 다른 곳에서 경력을 쌓은 인재를 채용하는 경우가 많다. 김씨의 경우에는 OECD 행정부서에서 별도로 예산을 편성해 그를 바로 채용했다. 실력과 성실함으로 임직원의 마음을 움직인 결과였다.

파리의 OECD 본부에는 한국을 포함해 30개 회원국에서 나온 약 2400명의 직원(임시직·정규직 포함)이 근무한다. 무역·산업 분야 위원회만 약 250개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크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월드뱅크를 비롯한 주요 국제기구도 함께 네트워크를 이룬다. OECD라고 하면 각국 대표들의 회담을 주최하거나 주요 통계를 작성하고 발표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 컨설턴트는 “회원국과 세계 경제발전을 도모하고 개발도상국으로의 원조와 자유무역 확대가 OECD의 궁극적인 목표”라며 “국가 간 긴밀한 협의가 중요해 탄탄한 인적·물적 네트워크가 꼭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정 컨설턴트가 맡은 ‘U-OECD’ 프로젝트 실행의 중요성은 그만큼 컸다. OECD 본부에서 매년 300~400개의 회의가 열린다. 참가자가 몇만 명에 이른다. 정 컨설턴트는 참가자가 지출하는 출장비를 줄일 방법을 연구했다. 영상카메라를 이용해 참여자가 서로 다른 지역에 있어도 회의가 가능한 방법을 제안했다.

그는 이 밖에 통신망을 이용해 커뮤니케이션을 활성화하고, IT 관리시스템을 활용해 효율성을 높일 몇 가지 프로젝트를 맡아 연구했다. 하지만 아직 실제로 적용된 사례는 많지 않다. “연구기간이 긴 데다 투자 비용 대비 효과 검토에 많은 시간이 걸려요. 공공기관이라 그런지 업무진행이 더딥니다. 회원국에서 예산을 지원받아서 비용 지출에 더 신경을 쓰고요.”

요즘에 정 컨설턴트는 태플릿PC와 이동단말기,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어디에서든 업무가 가능한 모형인 ‘모바일 엔터프라이즈’를 만든다. 다른 나라에 있는 OECD 회원국 직원 간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다. 세계 다국적 기업과 기술 협력을 한다.

각국 정부와 관계를 맺는 OECD에는 경륜이 있는 40~60대 직원이 많다. 정년을 보장받기는 무척 어렵다. “보통 5년마다 계약을 갱신합니다. 일반 정책부서에서 5년 이상 버티기가 어렵습니다.” 정부나 공공기관 경력이 있어야 승진에 유리하다. 조직에서 끌어줄 직원도 필요하다. 정 컨설턴트는 OECD에서 같은 나라 출신 직원들끼리 협력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탈리아 출신이 부서장으로 승진하면 팀원들이 이탈리아어를 쓰면서 서로 도와요.”

OECD에서 수요가 많은 인재는 통계전문가다. 회원국가에서 모인 자료와 통계를 서로 비교해 정책으로 제안할 일이 많아서다.
정 컨설턴트는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6시에 퇴근한다. 점심식사에 2시간 정도를 쓴다. 다른 부서 직원과 함께 또는 혼자 식사를 한다. 회식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회의 시간이나 간단한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다른 직원과 이야기할 기회가 없어요.” 각 직원의 사무실이 분리돼 있는데 정 컨설턴트도 넓은 사무실을 혼자서 쓴다.

 


르네상스 베이징 차오양 호텔은 심두현 이사가 인턴으로 일했던 곳이다.

 

 

OECD 직원의 연봉은 한국 임금 수준에 비하면 높은 편이다. 면세 혜택도 받는다. 하지만 물가가 비싸서 연봉 액수만 놓고 비교하는 건 무리다. “서울의 대기업 직원처럼 지출하면서 지내기는 어려워요. 두 명이 저녁에 외식을 하면 10만원이 넘게 나오는걸요.”

그는 주말이면 파리 거리를 걷고 미술관을 찾는다. 휴가를 내 유럽 주변국가에 있는 친구를 찾기도 한다. OECD 직원의 연간 휴가일수는 약 40일이다. 한 번에 1~3주 단위로 길게 휴가를 내기도 한다. 최근 정 컨설턴트는 휴가를 내 터키에 다녀왔다. 인도네시아에서 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 결혼식에 참석했다.
“50세 이후에는 세계은행이나 유엔개발계획(UNDP) 직원으로서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 정책을 세우는 일을 맡고 싶습니다.”


심두현 르네상스 베이징 차오양 호텔 영업·마케팅 이사
“300번 떨어져도 포기 안 했어요”
호텔경영전문 스위스 글리옹 대학 유학… 은퇴 후 부티크 호텔 경영이 꿈


2000년 대학 졸업을 앞둔 심두현(36) 씨는 스위스의 세계적 호텔학교인 글리옹 호스피탤러티 경영대(이하 글리옹 대학)에서 학부 과정을 다시 밟기로 했다. 졸업 후 평범하게 한국에서 직장인으로 살기보다는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꿈을 따라가기로 했다. “어릴 때부터 외국어를 많이 쓰며 여러 나라에서 일하고 싶었어요.” 그의 지인 중 외국계 호텔 직원이 많았다. 취업을 앞두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호텔리어에 관심이 생겼다.

심씨는 현재 중국 베이징에서 호텔리어로 일한다. 5성급인 르네상스 베이징 차오양 호텔 영업·마케팅 이사다. 스위스 글리옹 대학을 졸업하고 2004년에 지금 근무하는 호텔에서 인턴으로 일을 시작했다. 정직원으로 일할 자리를 찾을 때까지 호텔 300여 곳에 이력서를 냈다. “그때 많이 힘들었어요. 괜히 해외로 나왔다 싶기도 했죠. 지금은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대학 때 방학 기간에 여행을 많이 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여행자금을 모았다. 영어시험, 자격증 취득 준비에 시간을 쏟지는 않았다. “외국어 활용에 관심이 많았어요. 여행을 좋아하고요. 지금까지 가본 나라가 35개국 정도입니다.” 캐나다에서는 1년 동안 어학연수를 했다.

스위스 유학 얘기를 꺼냈을 때 그의 부모는 반대했다. 유학을, 그것도 석사가 아니라 전공을 바꿔 학사 과정을 다시 하기에는 부담이 컸다. 그는 대학에서 기본부터 배우고, 외국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싶다며 부모를 설득했다. 1년 동안 유학을 준비해 스위스로 갔다. 학비는 부모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주말에 글리옹 대학 주변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를 벌었다.

스위스 글리옹 대학은 호텔경영 관련 대학 중 세계 톱3에 꼽히는 명문대학이다. 하얏트·인터컨티넨탈·페어몬트를 비롯한 세계 유수의 호텔과 JP모건·모건스탠리 등 글로벌 금융업체로 많은 인재를 배출한다. 학부는 3년 6개월 과정이다. 마지막 두 학기에는 호텔에서 실습을 한다.

심씨는 글리옹 대학에서 20대 초반 학생들과 공부했다. 영어강의를 듣는 것이 예상보다 어려웠다고 한다. 그는 수업 내용이 어려워서 현지 학생들이 피하던 재무를 전공으로 골랐다. “영업·마케팅 부문에서 일할 때 대학에서 익힌 재무관리방법이 큰 도움이 됩니다.”

글리옹 대학 졸업 즈음에 그는 한국 소재 한 외국계 호텔 입사가 예정됐다. 그런데 대학 선배에게서 중국 베이징에 있는 호텔에 인턴 자리가 났다는 연락을 받고 중국에 가기로 결정했다. 인턴 임금은 한국 호텔 정규직 임금에 비해 적었다. 신분도 불안정했다. 그런데도 중국에 간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에서 취업하면 유학한 의미가 줄어든다고 봤어요. 그럴 생각이었으면 유학 안 가고 한국에서 공부했겠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호텔 수가 느는 중국에 성장할 기회가 많다고 봤습니다.”

정규직 아닌 베이징의 호텔 인턴 골라
베이징에서는 중국어 실력이 부족해 고생했다. 중국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외국인을 정직원으로 채용할 중국 호텔은 드물었다. 서류를 통과해도 인터뷰에서 떨어질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이력서를 계속 냈다. 7개월 동안 인턴으로 일한 그는 2004년 3월 인터컨티넨탈 파이낸셜 스트리트 베이징 호텔의 정식 영업매니저로 취업했다. 이후 조건이 더 좋은 호텔로 여러 번 이직했다. 지난해 7월에 르네상스 베이징 차오양 호텔에 취업해 자리를 잡았다.

그는 틈틈이 중국어를 익혔다. 현지인 직원이나 고객과 의사 소통하는 데 영어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호텔에서 일하다 만난 지금의 중국인 부인이 도움을 줬다. 심 이사의 부인 또한 글리옹 대학 출신이다. 호텔 영업·마케팅 부문에서 일하던 부인은 결혼 후 직장생활을 잠시 접었다. 심 이사는 근무하는 호텔에서 부인과 함께 지낸다. 처음에는 영어로 이야기했지만 지금은 중국어를 많이 쓴다. 식사는 대부분 호텔에서 한다.


심두현 이사(왼쪽 첫 번째)가 2006년 리젠트 베이징 호텔 오프닝 행사에서 동료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그는 호텔 객실과 연회장, 식음부의 매출관리를 맡는다. 2년 단위로 근로계약을 갱신한다. 실력이 부족하면 재계약을 못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가능성도 있어 한눈을 팔지 않는다. 요즘은 오전 6시에 일어나 출근 전에 일본어 공부를 하며 일본인 고객을 만날 경우를 대비한다. 바쁜 일정에도 운동은 꾸준히 한다. 호텔 헬스장을 이용하거나 수영을 한다.

해외에서 취업해 자리 잡기는 쉽지 않다. 심 이사는 막연한 동경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렵다고 했다. “철저히 준비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만이 살아남아요. 한국에서보다 어려운 점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중국에 온 지 6년이 지났지만 현지인 직원관리가 여전히 어렵다. 1가구 1자녀 정책에 따라 외동으로 자란 중국 젊은이는 팀워크에 약하다. “누가 어떤 일을 할지 정확하게 정해서 알려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이 진행되지 않아요. ‘내가 안 하면 다른 사람이 하겠지’라고 여기는 듯합니다.”

처음에는 중국의 ‘관시(關係) 문화’에 익숙지 않아 고생을 했다. 관시(關係)는 관계의 중국어 발음으로 인맥을 의미한다. 한국의 혈연·지연·학연과는 성격이 다르다. “한국의 혈연·지연·학연은 이미 정해져 바꾸기 어렵지만 관시(關係)는 만들어나갈 수 있습니다.”

심 이사는 초기에는 몇 안 되는 지인에게 다른 사람을 소개받아 비즈니스를 진행할 때가 많았다. 이제는 그의 인맥도 어느 정도 탄탄해졌다. 그는 생일 같은 행사가 있는 날에 지인에게 꽃이나 선물을 보내며 인맥을 관리한다.

호텔리어 생활은 밖에서 보는 만큼 화려하지 않다. 서비스 업종이라 고객 사정에 따라 야근이나 주말 근무를 할 때가 많다. “24시간 동안 고객들의 전화를 받기도 합니다. 고객이 잘 지내고 간다며 고마워하면 피로가 풀려요.”

5월에는 태국 식음부 프로모션을 열었다. 태국 메리어트 호텔 주방장을 초청해 태국음식을 소개했다. 영업·마케팅 이사가 꼭 해야 할 일이 아닌데도 나서서 행사를 기획했다.

그는 인력관리 일도 일부 맡았다. “다양한 일을 경험해 호텔 총지배인으로 일했으면 합니다. 은퇴 후에는 서울 외곽에서 작은 부티크 호텔을 운영할 계획입니다.”

 

해외에서 취업해 자리 잡기는 쉽지 않다. 심 이사는 막연한 동경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렵다고 했다. “철저히 준비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만이 살아남아요. 한국에서보다 어려운 점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출처: 중앙시사매거진

기사원문 :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288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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